◎ 대상작

병 원

길원여자고등학교 2학년

김 지 수

외할아버지 댁은 내게 병원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만 되면 완도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가 머물곤 했다. 그곳은 굉장히 시골이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마을에 전봇대가 두 대밖에 없었다. 어릴 적 나는 TV만화영화나 컴퓨터게임을 매우 좋아해서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 TV도 못보고,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가지 않겠다고 때를 쓰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 강제로 붙들려 배멀미를 해가며 도착한 외할아버지 댁은 어린 내게 심심한 허허벌판 같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보냈던 나는 고장난 TV가 있고, 근처에 피시방하나 없는 외할아버지 댁이 너무 시시한 곳으로 느껴졌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외할아버지께 재밌는 것을 달라고 졸라댔다. 그런 나를 외할아버지께서는 귀찮아 하시다가도 “우리 똥강아지”하며 예뻐해 주시고 나는 장단을 맞추어 재밌는 것을 함께 찾아보자고 하셨다. 그 재밌는 것이란 게 결국 무엇이냐 하면 주변의 온갖 동식물들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즐거웠는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작은 손에 쥔 방아깨비의 방아를 찧는 듯한 몸짓. 좀처럼 잡히기 않았던 신기하게 생긴 잠자리. 한꺼번에 잡혔던 두 마리의 매미. 봉투 안에 가득 넣었던 반딧불이가 발했던 예쁜 불빛. 작은 생수통 안에 한가득 담겨진 다슬기.

외할아버지와 함께 신나게 뛰놀며 시간가는 줄 모르다 저녁을 먹으러 외할아버지 댁에 돌아갈 때면 보았던 해질녘은 정말 예뻤다. 또한 방안에 들어가면 이미 맛있게 차려져 있었던 밥상은 날 들뜨게 했다. 외할아버지 댁의 식기들은 모두 낡고 커다랗고 그리고 어딘가 구린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외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떠올려지는 그 냄새를 꽃향기보다 좋아한다. 그 냄새나는 커다란 식기에 외할아버지께선 밥을 머슴밥처럼 가득 담아주셨는데, 나는 용케도 그걸 싹싹 다 비워 냈었다. 신나게 뛰논 탓에 배가 많이 고파서였을 것이다. 밥을 한가득 먹고 나면 마당에 나와 밤공기를 쐬며 풀벌레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봤다. 너무너무 예뻤다. 자연이 만들어낸 플라내타리움이었다. 그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방학숙제 걱정도 뛰놀다가 무릎이 까진 것도 다 잊어버렸다. 별을 세다가 또는 별자리 이름을 마구 외다가 지쳐 눈을 감으면 그런 나를 외할아버지께서는 번쩍 들어 안아 안방에 옮겨주셨고 그렇게 나의 하루가 지곤 했다.

방학이 끝나면 어린 나는 영 다른 아이가 되어 집에 돌아갔다. 어릴 적 나는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부모님께서는 일 때문에,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는 학원에 갔다 늦게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TV를 보면서,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집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면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 잘 먹지 않고 끼니를 걸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하얗고 쪼그맣고 깡마르고 골골거렸다. 마치 환자처럼 그러나 외할아버지 댁에 다녀오면 나는 몹시 건강해져있었다. 그렇게도 크지 않던 키가 커있고,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타 활기 있어 보이고, 살이 제법 올라 보기 좋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를 통과의례처럼 여겼던 어린 나의 신체는 몹시 튼튼해져 있었다.

또한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해졌다.

어렸지만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고민과 근심이 있었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외할아버지께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이건 비밀인데”하고 많이 말했다. 언니가 나랑 안 놀아준다던지. 짝꿍이 밉다던지. 외할아버지께서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지만, 어쨌든 내 고민을 들어주셨단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내겐 상당한 위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할아버지 댁에 다녀오면 내겐 즐거움만 남았었으니 말이다. 외할아버지 댁은 내게 병원이었다. 약품냄새대신 식기의 구린내가 나고 차가운 청진기 대신 주름진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닿고 규칙적인 기계소리 대신 풀벌레소리가 들리는 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치료해주었던 세상에 하나뿐인 이제 없는 병원. 종종 그 병원에서의 시간이 생각날 때면 저절로 내게 최고의 의사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가 함께 떠오른다. 그땐 너무 어려서 드리지 못했던, 오늘에서야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내게 그렇게나 멋진 병원을 선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